Title : Yoonmi Bae "그림자 自, 방"
Date : Nov. 24th ~ Dec. 12th, 2017
Opening : Nov 24th, 2017 Fri. 6 pm
Place : Salon Artertain (Yeonhi-dong, Seodaemungu)
Curator : Heeseung Hwang (+82 (0)2-6160-8445)

 

그림. 자(自), 방.

“삶의 어떤 흔적, 체취, 자국들, 틈새, 일상, 사이 공간, 그 마주침들. 그리움, 꿈꾸기, 몽상과 상상, 혹은 그 기억과 기록들. 잊기, 도피, 외로움, 고독, 진정과 안식들, 휴식, 방, 고요함, 내밀함, 고백, 마음의 풍경들. 세밀함과 옅음, 짙은 자취들, 촘촘함, 매끈함, 말랑함, 뾰족함과 무딤, 혹은 가녀린 손길이자 단단한 마음들. 그렇게 그리기 혹은 지우기, 비우기, 펼치기, 접기, 긁기, 겹치기, 문지르기, 드로잉들. 상처, 피부, 촉감, 껍질이자 알맹이, 씨앗, 알, 변형, 되기. 처음도 끝도 없는, 반복들, 수없는 질문들, 수다와 침묵들, 숨기와 드러내기, 아픔, 치유하기. 그림자, 지워지는, 드리우는, 스스로, 방, 열림과 닫힘. 멍과 멍, 자기와의 조우, 깨달음, 길고 느린 과정들, 깊은 응시, 무심한 바라보기. 선, 연결, 중첩 혹은 덩어리, 커다란 점, 얼룩, 여백들. 비정형, 가변성, 텅 빈 그러나 꽉 찬, 움직임과 멈춤, 울림과 여운들, 있는 듯 없는 듯한, 중심 있음과 없음, 자유로움 …. 그리고 어떤 작가의 말처럼 사이의 사이에서 사이를 위한, 미래의 기억들까지” 우선은 작가의 그림을 떠올리게 하는 것들을 두서없이 도란도란 펼쳐 보면서.

작가의 그림을 실재로, 가까이서 자세히 보게 되면 미처 주목하지 못했던 세밀한 형상들은 물론 촉감, 손길들마저 살아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쉽게 그 모습들이 잡히지 않는 유연하고 가변적인 형상들이 화면 속에서 나지막이 출렁거리고 있어 좀처럼 그 의뭉스러운 속내를 드러내지 않은 탓일 것이다. 특정한 형상을 그리지 않은, 비정형의 드로잉들로 말이다. 그렇게 무언의, 그러나 수다스러운 것 같기도 한 말들을 어떤 고백들처럼 수줍은 듯이 전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속내는 이와는 다르게 내밀하고 단단하고, 또 복잡다단한 느낌들로 꽉 차있어 모두(冒頭)에서 말한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작가의 그림을 세밀하고 천천히 보아야 하는 이유들이기도 하다. 이는 표현상으로 볼 때 단일한 질감의 연필 드로잉이 아니라 건조하고 딱딱한 질감에서 짙고 습한 느낌들까지 거칠고 매끄러운 여러 가지 연필들(6H~9B)을 포함하여 때때로 붓, 수성흑연, 고체물감, 주먹(朱墨)등을 이용하기도 하고 강약의 힘을 조절한 그리기, 긁기, 문지르기, 겹치기, 콜라주에 이르는 다채로운 표현을 마다하지 않았기 때문인 듯싶다. 드로잉 특유의 선적인 것들, 섬세한 표현들이 비교적 복잡하지 않은 형(形)을 이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느낌들이 전해지는 것은 이들 다채로운 질감들의 표현을 통해 성기고 촘촘한, 무디고 뾰족한 것들은 물론 매끈하고 촉촉한, 물컹하고 말랑한 느낌들, 무언가 스멀스멀 삐져나올 것만 같은 덩어리지고 촉각적인 것들까지 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서로 다른 표현들이 한 몸을 이루며 이질적으로 공생하는 느낌들이다. 섬세하고 여린, 혹은 성기고 짙은 서로 다른 느낌의 선들을 바탕으로 다시 그 다양한 질감이 표현된 선들이 수없이 더해져 구체적이고 생생한 감각의 살을 이루어 마치 살아있는 피부처럼 건조하면서도 기름진, 서로 다른 질감들이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 자유롭고 세밀한, 촉각적인 표현들이 수다스러운 세(勢)와 울림들을 이루고 있음에도 일반적인 의미에서는 좀처럼 보이지 않은 가변적인 형상들로 자리하기에 작가의 그림은 겉으로 쉽게 드러나지 않은 내면의 목소리처럼 대체로 차분하고 조용한 느낌들로 전해진다. 그렇기에 작가의 그림은 겉으로 드러난 것 이상으로 그 숨겨진 속내들이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보이는 것들을 보이지 않게 하는 동시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이게 하고 있는 셈이다. 작가의 내밀하고 복잡한 삶의 어떤 흔적들, 자취들을 전하려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연필) 드로잉은 작가의 내면의 심경들을 자유롭게 펼칠 수 있는 적합한 방식이 아니었나 싶다. 알 듯 말 듯 속으로 켜켜이 쌓여가는 어떤 느낌들을 속삭이듯 공감케 하는 단순하고 담백한 드로잉 말이다. 그리고 작가의 드로잉은 여느 드로잉들처럼 그림의 개념적인 밑그림이거나 혹은 특정한 형태나 이야기들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내면을 포함하여 좀처럼 알 수 없는 것들을 향해 닿으려 하는 행위라는 점에서 구별된다. 분명하고 명확하게 전달되지 않는 것들, 쉽게 언어화되지 않는 어떤 경험들, 기억들과도 같은 느낌들을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정형의 명확하지 않은 형태들에 더해 촉감적인 표현이 두드러졌던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그렇기에 때로는 숱한 반복들이 되풀이되기도 하고, 때로는 알 수 없는 형상들을 더하고 지우면서, 솔직하면서도 미묘한 행위들, 그 자국들이 남겨지게 되는 것이다. 수없이 되풀이 되는 자신의 일상 속에서 마주하는 숱한 생각들, 그 크고 작은 고민들과 늘 같은 느낌들일 수 없는 감정의 기복마저 조심스럽게 담아내려 했기에 차분하고 정적인 느낌들이 주를 이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적일 수밖에 없는 미세한 울림들, 그 떨림마저 전해졌던 것이 아닌가 싶다. 여기에 다양한 질감의 연필 드로잉이 전하는 흑백의 미세한 농담들, 색감들의 차이로 인해 무색의 색이지만 다채로운 느낌들이 전해졌던 것이고 때때로 주먹의 과감한 사용을 통해 직접적이고 감각적인 표현을 한 것도 이런 복잡 미묘한 느낌들에 일조한 것 같다. 연필 드로잉 특유의 직접적이고 솔직한 느낌들을 담아냈을 뿐만 아니라 일상 곳곳에서 마주하는 삶에 대한 복잡다단한 생각들, 그 감정의 편린마저 전하려 했기 때문일 것이다. 단순하지 않은 이들 심경들을 마치 숨을 고르듯 완급을 조절하면서 밀고 당기듯 표현한 것이다. 간혹 지나간 과거의 어떤 기억일 수도, 혹은 앞으로 마주칠 미래의 어떤 순간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작가의 그림은 그렇게 작가를 둘러싼 크고 작은 혹은 커다랗고 소소한 삶의 이모저모를 자유롭게 마주할 수 있는 장이자 그 수다한 생각들과 감각들을 모으고, 잇고, 혹은 끊어내고 매듭지으면서 정리할 수 있는 삶의 어떤 방편들이 아니었나 싶다. 힘겹기만 한 현실을 작가만의 방식으로 마주하고 함께할 수 있는, 작가로서의 또 다른 현실 말이다.

그림, 자(自)

그림이 작가의 또 다른 현실이라는 면에서 작가에게 있어 그림은 작가와 함께 하는, 혹은 작가를 따라다니고 드리우는, 그림자이기도 할 것이다. 작가의 그림은 명확하고 분명한 형상들 대신 겉으로 쉽게 드러나지 않은 작가의 내밀한 속내를 마치 그림자처럼 드리우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그림을 통해 세상과 대면하고, 연결된다. 그렇게 살면서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들을 그림으로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작가의 이러한 만남, 연결은 현실적인 존재로서의 세상과의 마주침이기도 하겠지만 동시에 ‘그림을 통한’ 세상과의 마주침이기도 할 것이다. 세상에 대한, 혹은 그러한 세상과 연결되어 있는 자기 스스로에 대한 수없이 많은 생각들, 감각들을 펼치고 접어내는 특별한 행위들로 말이다. 그렇기에 생경하고 낯선 현실과의 외적인 마주침일 수도 있겠지만 동시에 그러한 현실을 그림을 통해 내적으로 변모시키는 작가만의 각별한 만남이기도 한 것이다. 밖으로 내쉬는 날숨과 안으로 내들이는 들숨이 서로 교차하며 조율되듯 세상을 둘러싼 것들에 대한 여러 가지 복잡한 심경들을 겉으로 드러내면서도 이를 다시 속으로 삭이고 고르는 과정들이 되풀이되면서 그렇게 그림으로 세상과 대면하고, 또 관계하는 작가 스스로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작가에게 그림은 스스로의 현존을 통한 세상과의 직접적이고 감각적인 연결이고, 그러한 연결을 다시 굴절, 변형시키면서 ‘스스로’를 다른 방식으로 세상에 ‘그려내는 행위’라는 면에서 ‘그림, 자(自)’인 것이다. 사물과 존재의 또 다른 바탕, 그 이면으로 자리하는 그림자처럼 그림은 작가를 다른 방식으로 드러내고, 드리우는, 스스로에 다름 아닌 것이다. 세상과의 존재론적이고 감각적인 연결에도 불구하고 현실과의 직접적인 조응만이 아니라 거리를 두고 느슨하게 놓아둘 수 있는, 혹은 이를 지우고 끊어낼 수도 있지만 결국은 계속해서 스스로를 따라붙고 마는 그런 관계, 만남인 것이다.

그렇기에 작가의 그림은 작가 스스로를 드러내는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또 다른 분신처럼, 직접적이지만은 않은 숱한 생각들, 감각들, 상상들마저 더해지면서 가변적이고 유연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작가 앞에 바로 놓인 세상을 정합적인 방식으로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내밀한 실존들, 경험을 통해 걸러진 것들을 마치 그림자처럼 드리우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과 마주하고 있는 작가 앞의 명확하고 분명한 것들만이 아닌 그 이면에 길게 드리워진 것들, 겉으로 미처 전할 수 없는 것들을 내면으로 다시 반추하여(反), 비추고(影) 있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간혹 그 외형의 모습들이 다소 낯설고 가변적일지라도 그 이면의 깊은 존재감으로 인해 진솔하고 편안한 느낌들을 받지 않았나 싶다. 결국은 스스로에 다름 아닌, 작가의 또 다른 솔직하고 자유로운 모습들을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그렇게 그림자처럼 스스로를 드리우는 그림. 자를 그렸던 것이다.

스스로(自)의 방

그림자처럼 솔직하고 자유롭게 드리워졌기 때문일까, 작가의 그림은 가변적이고 다형적인 모습들로 시시각각 그 느낌들을 달리한다. 그때그때 마주한 세상의 어떤 느낌들을, 매순간 다른 생각과 감각들로 변해가는 것들을 자유롭고 편하게 전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마음속에 드리워진 갖가지 상념들, 고민들을 주름 짓고 있는 작가의 그림은 반복과 차이를 되풀이하는 행위의 순간들과 시간의 흐름들이 겹쳐지고 더해져 작가 특유의 공간이 만들어진다. 마음속에 품어낸 복잡다단한 세상을 둘러싼 여운들, 그 울림들을 수다하게 펼치고 접어냈기 때문일 것이다. 이를 바깥으로 겉으로 무한히 펼쳐내는 것만이 아니라 다시 안으로 속으로 부단히 접어냈기에 일정한 공간적 윤곽들, 그 넓이와 깊이감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스스로를 드리웠던, 그림, 자들이 수없이 겹쳐지는, 그리고 작가만의 내밀한 것들이 오밀조밀하게 모이고 쌓이는 자기만의 공간, ‘스스로의 방’ 말이다. 그렇게 작가는 그림을 통해 세상과 연결되어 있고 또 마주하고 있는 자기만의 방을 만들어간다. 하지만 그저 세상을 향해 무한하게 열려있는 방만은 아닌 듯하다. 세상과 연결되어 있지만 일정하게 자기만의 거리를 둔, 일상의 틈새, 그 사이공간에 자리하여 자기 자신과의 솔직하고 편안한 만남이 이루어질 수 있는 방이며, 그렇기에 때로는 그러한 번잡한 세상사의 일들마저 잊고, 지울 수 있는 도피이자 안식처럼 편안함을 주기도 하고, 때로는 그 안에 숨어 은밀한 꿈들마저 꿀 수 있는 방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작가의 방은 이들 달콤한 꿈들은 물론 쉽고 간단치 많은 않은 세상에 대한 갖가지 고민들로 얼룩져 있는 방이자, 그러한 상처들을 치유하고자 하는 작가의 삶에 의지들이 뒤섞인 방이기도 할 것이다. 혹은 세상과의 열린 틈으로 매순간 분명하지 않은 것들도 다가오는 현실을 향한 작가 자신의 어떤 느낌들, 수많은 의문들로 가득 차 있는 방이란 생각도 든다. 마치 작가의 작업이 반복된 긋기와 겹치기를 통해 형태를 만드는 것인 동시에 지우는 것인 것처럼, 그리고 수없이 되풀이된 긁기와 문지르기를 통해 상처를 내고 다시 아물게 하는 것처럼, 작가는 복잡하기만 한 세상에 대한 심경들, 그 내밀한 상념과 감각들의 풍경은 물론 그러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스스로에 다름 아닌 그림들, 작가로서의 자기만의 방을 힘겹지만 자유롭게 만들어가고 있는 것만 같다. 스스로 그림, 자가 되어가는 것처럼, 길게 드리워진 어떤 여운들을 남기면서 말이다. (글. 민병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