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시 명: 연미 기획초대전 "Layers"
전시기간: 2017년 02월 11일 ~ 02월 28일
전시 오프닝: 2017년 02월 11일 (토요일) 오후 6시
장소: 쌀롱 아터테인 (서대문구 연희동 708-2)
전시기획: 황희승 큐레이터 02-6160-8445

 

텍스트의 변심 : 권력과 기록의 사이


신문은 사건과 사고들을 담아 시간을 기록한다. 신문기사는 사건과 사고의 객관적인 사실에 입각하여 기록하는 일종의 글로 편집된 파노라마 사진과 같다. 따라서 거기엔 기사를 쓰는 사람의 그 어떤 생각과 주장이 섞여서는 안된다. 사실 그 자체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 물론, 기사를 쓰는 주체가 사람인 만큼 사실을 바라보는 시점과 위치는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했듯이 파노라마 사진은 셔터를 누르고 카메라를 한바퀴 돌려 다시 제자리로 온다는 가정하에 사실을 바라보는 시작점은 다를 수 있지만 그 사실 전체에 대한 기사는 객관적으로 노출되어야 한다. 우리의 근현대사를 겪어 온 우리 신문의 역사를 살펴보면 일제의 탄압에 굴복했어야 했고, 독재정권의 기관지로 전락했었던 적도 있다. 인간에 의해 자행되는 사건과 사고들은 언제나 힘의 논리에 지배받기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 ‘사실’이라는 말에는 이미 조작이라는 의미를 품고 있는 듯 하다. 해서 어려서부터 우리에게 신문지는 늘 어딘가에 굴러다니는 포장지였으며, 벽지였으며, 화장지였던 것 같다. 조작된 사실에 대한 생활밀착형 무관심과 처벌의 일환으로.


십여년은 족히 넘었다고 했다. 연미 작가가 신문, 그것도 종이에 인쇄된 신문에 천착하게 된지는. 상상력의 세계가 더 편한 작가의 시각으로 사회를 바라볼 수 있는 가장 감성적인 매체는 신문이었다고 한다. 종이신문은 작가에게 지극히 개인적인 매체로서 세상을 이리저리 뒤집어보고 편집해 볼 수 있는 좋은 재료였었던 듯 하다. 그렇게 바라본 자신만의 사회를 신문 위에 다시 재구성하여 자신만의 신문을 발행하였다. 그리고 작가는 그렇게 발행된 신문을 어떻게 사람들에게 보여 줄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이동과 설치가 매우 용이한 작가의 가판대였다. OO일보와 같은 권위가 사라진 작가만의 신문은 가독성과 신뢰가 떨어진 반면 권위에 의해 가려진 기만과 조작에 대한 의심은 사라진다. 권력과 기록 사이의 이중적 변주로부터 자유로운 신문의 창간이고 매우 독점적이면서도 대중적인 소통이다. 이동이 용이한 작은 전시장이기도 했다.


연미 작가의 신문에는 몇가지 반복되는 편집방식이 있다. 물론, 보다 다양한 편집방식이 연구되고 개발되겠지만 여태까지의 중첩된 방식은 지우기, 뜯어내기, 남기기, 그리기, 붙이기다. 이 방식 외에 연구될 방식이 얼마나 더 많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 방식을 통해 작가는 자기만의 신문읽기, 즉 사회를 읽고 있다. 그리고 그 가려져 있던 권력의 이중성을 대놓고, 아니! 살살 보여준다. 힘의 논리에 힘으로 맞서는 것. 그것 역시 폭력이며 그 폭력으로는 왠만해서 힘의 논리에서 살아남기 쉽지 않다. 또한, 힘의 논리에 힘으로 맞서 승리하였다고 해도 아군의 피해 역시 만만치 않은 것, 역시 힘으로 맞서지 말아야할 중요한 이유인 것이다. 작가는 그 논리에서 벗어나 뒤에서 살짝 무릎을 쳐 흔들릴때 밀어버리는 싸움을 즐긴다고 한다. 이 싸움의 기술에서 비롯된 듯한 그만의 편집 방식은 우리에게 집중과 선택의 중요한 지점을 보여주고 있다.


연미 작가의 지우기와 남기기 방식은 이미지에 집중한다. 조작되거나 사실을 은폐한 기사보다는 이미지 그 자체가 주는 정보전달력이 있다. 물론, 그 이미지도 각 신문사의 성향에 따라 사진 찍는 위치와 시점이 다르다는 것이 작가에게는 흥미로웠던 부분이다. 어디서 어떤 각도를 유지하느냐에 따라 중요한 사실이 노출되지 않을 수 있는 것 역시 이미지의 한계다. 그러나 사실을 기록한 기사가 다 지워진 이미지는 독자들로 하여금 제6의 감각을 불러낼 수 있는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물론, 뜯어내기 방식 역시 이미지에 대한 분석이다. 이 방식은 여러 나라의 일간지 기사와 함께 실린 이미지들을 뜯어내 한꺼번에 배치시켜 놓는 작업이다. 이 역시 기사와 상관없이 이미지에 집중하게 되는데 문제는 이미지들을 한꺼번에 모아 놓았을 때 그 나라가 겪고 있는 문제를 그 나라의 언어와는 상관없이 짐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각 국가의 통치 체제에 따라 사용하고 있는 이미지의 내용과 크기 등의 차이와 어떤 부류의 사건들을 좀 더 심각하게 다루고 있는지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같은 사건들을 국제적으로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도 분석될 수 있는 재밌는 편집 방식이다.


그리기 방식은 신문의 헤드라인과 기사들을 이용하여 전혀 다른 언어를 만들어낸다. 신문이지만 그 어느 누구도 읽을 수 없다. 신문이라는 권위가 사라진 그러나 신문처럼 보여짐으로 인해 무언가 정보를 얻고 사건 사고를 읽고 싶게 만드는 작업이다. 결국 신문은 읽혀지지 않을때는 텍스트가 만들어낸 관찰 가능한 물질인 것이다. 일종의 사회가 만들어 낸 물질로서 신문은 기사의 내용의 경중을 떠나 그 자체 물질성 갖는다. 예를들어 세월호를 다룬 모든 신문의 무게가 3kg 이었으며 폐지 1kg에 90원이면 세월호 기사의 가치는 270원인 셈이다. 물론, 세월호에 대한 참된 시각과 객관적인 기사의 가치는 그 어떤것으로도 환원될 수 없겠지만 날조와 기만의 기사들은 저만한 폐지의 가치조차도 없을 것이다. 신문은 이렇게 각 신문사의 성격에 따라 우리로 하여금 다양한 정보와 객관적인 사실, 때로는 감동과 사회적 편견 혹은 권력에 의해 조작된 정보를 매일 매일 전달하고 있다. 따라서 시쳇말로 여자의 변신은 무죄일지 몰라도 텍스트의 변심은 명백하게 유죄다.


연미 작가의 연구에 따르면 보수적 성향이 강한 신문은 이미지가 크다고 한다. 이유는 보수 성향은 이성적 판단보다는 감정선을 건드리는 것으로 독자들의 감성적 판단에 많은 부분 기대고 있는지도 모를일이다. 권력은 체제 유지를 위해 늘 공포와 게시록을 순차적으로 프로그래밍 한다. 보수 성향이든 진보 성향이든 신문은 그 전방에서 권력을 견제하고 쫓으며 공포와 게시록을 전달한다. 누군가에게는 게시록이 해결의 실마리며 사회 참여의 기틀이 될 수 있고, 누군가에게는 공포가 될 수 있고 혹은 공포 그 자체로 인해 사회 참여를 아예 포기해 버리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이 우리에게 사실을 이야기 하는 자세인가를 명확하게 파악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파악하기 위한 우리만의 편집 방식을 갖는 것이다. 사건에 따라 판단을 하는 것이 아니라 판단의 기준이 사건 보다 먼저 있어야 한다. 그것이 작가의 편집증적인 일인 발행에서 얻을 수 있는 사회와 우리의 관계 설정의 묘미일 것이다. (글. 임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