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시 명: 최원석 기획초대전 "Limbo"
전시기간: 2019년 9월 20일 ~ 10월 8일
전시 오프닝: 2019년 9월 20일 (금요일) 오후 6시
장소: 아터테인 (서대문구 연희동 717-14)
전시기획: 황희승 큐레이터 02-6160-8445

 

이중의 공간, 떨어지면 피는 꽃


모든 겹쳐지는 부분에는 그 경계가 모호해지는 공간이 존재한다. 이쪽도 저쪽도 아닌 말 그대로 경계를 지표 하는 부분, 혹은 공간들. 이는 판단을 계속 유보하게 되는 정신 활동에서도 보여진다. 이것은 무엇이다. 라는 정의를 내리기 이전에 끊임없이 그 판단을 미루게 되는 것. 이것과 저것의 경계를 공고히 하기 위한 유보의 과정, 마찬가지로 이것과 저것의 판단과 정의를 내리기 이전이거나 어쩌면 아예 판단 자체를 유보시켜 버리는 일종의 해체적 정신활동이다. 해체적 정신활동은 이미 구축된 것들을 의심하는 것은 물론, 구축 자체를 계속 지연시키면서 상황과 대상을 인지하는 정신활동이다.
최원석의 사진은 사진이라는 원론적인 기능에 집중한다. 생성과 소멸이 동시에 공존하는 공간이라든지, 경계가 모호한 상황이나 과정이 드러나는 사물들을 다큐멘터리 한다. 또한, 그의 사진에는 그 어떤 연출이 없다. 무수한 답사를 통해 대상들을 발견하고, 그가 발견한 대상들의 의미가 가장 적절하게 드러날 수 있는 빛이 비치는 시간을 정한다. 그리고 그의 뷰파인더로 최종확인. 그렇게 담긴 그의 이미지들은 항상 경계가 모호한 공간이며, 그것을 대표하는 대상들이다.


2011년부터 작가의 작업은 세종시에 집중한다. 연기군에서 세종시로 변해가는 과정들을 쫓았다. 그야말로, 그 곳은 생성과 소멸이 동시에 존재하는 공간이며, 그러한 과정들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거대한 피사체인 셈이다. 철거와 건축이 동시에 일어나는 그 거대한 피사체를 보면서 최원석의 사진은 점점 더 시각적인 감수성으로부터 스토리텔링으로 무게 중심이 이동한다. 세종시에 들어서게 될 수많은 건물들과 그 건물들을 분양하기 위한 모델하우스들. 연기군이 철거되는 과정에서 떠난 사람들의 흔적들. 그 동안 최원석의 사진이 그 흔적에 담겨 있는 시각적인 감수성으로, 생성과 소멸을 이야기해 왔다면, 모델하우스들을 통해 그의 사진에는 다양한 스펙트럼의 스토리텔링이 담기게 된다. 일종의 천국도, 지옥이나 연옥도 아닌 변방, 혹은 중간지점으로서의 공간인 Limbo처럼.


카톨릭에서는,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못하고, 이미 죽은 의로운 선조들 또는, 영세를 받지 못하고 죽은 어린아이들이 죽어서 가는 곳. 천국도 지옥도 아닌 천국(지옥) 어딘가의 변방을 림보라고 부른다. 어쩌면 우리 인간들의 편리와 변명을 위한 가상의 세계인 듯 하지만, 림보는 단순히 종교적 해석을 너머 우리의 정신세계에도 늘 존재하는 공간이다. 다시 말해, 기본적으로 인간의 의식은 많은 부분 판단의 오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따라서 그 판단 자체를 연기하거나, 아예 포기하는 식으로, 그 오류를 극복하고자 하는 것이 해체적 인지활동이다. 바로 그 연기하거나 포기하는 지점이 정신세계에서의 변방이자 림보다. 그리스도라고 하는 대상을 몰랐거나 영접하지 못함으로써 바로 지옥으로 가야 할 일은 아니라는 것. 대상을 선입견 없이 있는 그대로 판단한다는 것 자체는 불가능 하다. 따라서 그 대상을 아예 모른다는 전제하에 끊임없이 그 주변으로부터 전체를 파악해 나가고자 하는 방식. 일종의 림보적 인지활동이다.


최원석은 그 수많은 모델하우스에서 림보를 떠올리게 된다. 세종시에 건축될 건물들을 미리 보고, 누군지 모르지만 그곳에서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대상을 직접 경험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방문하는 곳. 마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이 가는 림보와 같다는 것이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넘어가는 이중의 공간이자 경계의 지표, 즉 접히면, edge (변방) 이지만 펼치면, 접혔던 흔적으로만 남는 그런 공간인 것이다.


작가는, 그런 모델하우스의 주변을 밤낮으로 그의 뷰파인더에 담았다. 그리고, 그 이중의 공간에서 피어난 (떨어진) 꽃 무더기를 발견한다. 세종시 건설을 위해 땀 흘린 인부들이 벗어버린 빨간 코팅 장갑들이다. 넝쿨 꽃밭을 이루고 있는 듯 무더기로 쌓여져 있기도 하고, 빗물로 웅덩이가 진 곳에 표표히 고개를 드러낸 연꽃처럼 피어난 빨간 꽃들. 작가는 과감히 그것들을 ‘꽃처럼’이 아니라 ‘꽃’이라 부른다. 낙화. 떨어진 꽃. 그러나 엄밀히 말해, 빨간 코팅 장갑은 인부의 손에 의해 버려져야, 땅에 떨어져야 필 수 있는 꽃이다. 말장난 같지만, 떨어져 지는 꽃이 아니라 떨어져 피는 꽃인 것이다.


세종시에는 이제 소멸된 연기군의 흔적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그곳이 연기군이었음을 아는 사람들이 있는 한, 세종시에 연기군의 흔적이 전혀 없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누가 뭐라 해도, 세종시는 그 이전 지역(공간과 사람들)을 통해서 이루어진 역사를 지울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제 그 곳에 어떤 건물들이 들어서고, 그 건물들이 그 곳의 풍경들을 어떻게 만들어 낼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물론, 모델하우스를 통해 짐작은 할 수 있고, 시 전체의 청사진을 누군가는 그리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겠지만.


무엇이 변한다는 것은 변하기 전 모습을 얼마나 과감하게 버리느냐 혹은, 잘 발전시키느냐가 중요한 관건일 것이다.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못한 어린 아이들이 죽어서 가는 림보처럼, 세종시의 변화가 과연 대상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막연한 상상만으로 이루어진 변명의 파라다이스가 되진 말았으면 하는 바램이다. 어쩌면 그것이 십년 가까이 최원석의 다큐멘터리에서 보여지는 핵심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무엇인가, 이곳과 저곳으로, 이것과 저것으로 구별되기 전 그것들이 공존하는 시간과 공간. 그것을 정의하는데 있어, 지극히 객관적이면서 다양한 스토리가 전해지는 작가의 시선도 시선이지만, 과연 우리는 무엇을 정의하는데 있어 얼마나 다양한 의심의 여지를 가지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 봐야 할 일인 것 같다. (글. 임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