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 : Jaechul Jung "Procedure of Communication"
Date : Nov. 10th ~ 21st, 2023
Opening : Nov. 10th, Fri. 6 pm
Place : Artertain (Yeonhi-dong, Seodaemungu)
Curator : Heeseung Hwang (+82 (0)2-6160-8445)

 

사회적 관계 내 이중적 시각의 의미

시대는 변화와 보존이라고 하는 두 갈래 주장의 첨예한 대립으로 발전해 왔다. 말 그대로 변화는 기존의 구축된 시스템을 거부하고 새로운 시스템으로 바꾸려 노력하는 것으로 실험과 증명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 반면 보존은 실험과 증명이 필요한 시간 동안 발생하는 불안정하고 무질서 함으로부터 기존의 안정적인 시스템을 보호하고자 했다. 따라서 이러한 정반대의 주장이 서로 부딪히지 않는 평행으로 자기의 길을 걸어 왔다면 지금의 발전은 없었을 것이다.


똑 같은 방향으로 나란하게 간다면 서로의 주장은 반한다기 보다는 그저 각각의 다른 입장일 뿐일 것이다. 반대의 의미는 서로에게 간섭이 되어야 반대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변화와 보존은 서로 간섭함으로써 시대 발전의 방향과 방법을 찾을 수 있게 된다. 이는, 또한 시대의 다양한 모순들이 발생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근래 행위의 추상에서 정신적 추상으로 회화의 영역을 확장하고 있는 정재철의 초기 작업들은 이러한 발전의 과정에서 드러날 수 밖에 없는 모순, 즉 이중적 사고와 판단에 집중해 왔다. 서로 다른 사고와 판단을 주장해야만 하는 상황, 누군가를 이기지 못하면 내가 이 사회에서 도태되어야 하는 사회적 문제를 격투장면으로 대체하고, 체르노빌 사태, 아프카니스탄 내전, 6.25 전쟁, 아프리카 알비노 사냥 등 극단의 대립으로 치닫는 사회적 관계에 대해 고민하고 작업의 주제로 그 대립 속에서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그려왔다. 강렬한 색채대비를 통해 표현된 그들의 얼굴은 마치 발전과 파괴라고 이분법적 사회적 관계에 대한 극단적인 폭력과 고통을 고발하고 있는 듯 하다.


재현적 기법이라고 하는 것이 형태를 인식할 수 있는 회화적 기법을 통틀어 이야기 하는 것이라면 충분히 정재철의 얼굴들은 재현적 기법으로 표현되었다고 말 할 수 있다. 그러나 정재철의 재현적 기법은 단순히 대상을 보이는 그대로 충실하게 전달하는 일루전 기법이 아니라 모순과 같은 극단의 대립에서 오는 팽배해진 사회적 관계 내 이중적 시각을 표현하고자 하는 선택적 기법이다.


그렇게 표현된 그의 인물들, 그것이 역사와 시대를 통해 누구나 다 아는 인물이든 동시대를 사는 익명의 인물이든, 작가는 적어도 그 인물들이 겪어왔을 이중적 가치 판단을 표현하는데 집중했고 결국, 재현적 기법을 넘어 표현된 인물의 얼굴들을 단순한 이중적 시각이 아니라 제삼, 제사의 시각으로 사고할 수 있는 범위를 확장하기 위해 해체했다. 쉽게 말해 추상화 시켰다. 이는 권력에 의해 혹은, 누군가의 개인적 이익을 위해 정해진 사회적 통념이나 시스템을 무력화 시킬 수 있는 새로운 판단과 사고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실상 정재철 작가의 추상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처음부터 작가의 사고를 바탕으로 표현하고 있는 추상작품은 그 만큼 대상을 바라보고자 하는 사고의 흐름과 내면에 집중되는 반면, 정재철의 추상은 사회적 관계에 있어서 다양한 경험과 역사적으로 혹은 시대적으로 극한 대립 관계에 놓였었던 인물들이 먼저 그려진다. 그들이 겪었던 사실을 근거로 극한 대립의 명분이 되는 이분법적 정의를 해체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정재철의 추상이, 회화가 대상을 철학 하는 즉, 사고하는 방식이다. 이는 더 이상 내가 맞고 너는 틀렸다라는 폭력적 정의에 대한 판단과 결정은 유보되고, 해체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해체는 기존의 틀과 정의를 무작정 인정하고 사회적 가치로 받아드리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틀과 정의 이면의 또 다른 의미를 찾고자 하는 정신활동이다. 사회적 관계 내에서 우리의 생각들은 끊임없이 정의 내려진다. 그것이 또 한편으로는 정신활동의 기본적인 욕구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성적 판단을 근거로 사고의 다양성이 인정되지 않는 정의는 오히려 대상을 지엽적으로 판단하게 만든다. 따라서 해체는 이미 정의 내려진 판단이라고 해도 그 정의를 의심하고 대상 이면에 있을 또 다른 의미를 찾고, 그렇게 찾아진 의미를 또 한번 의심하고 또 다른 의미를 찾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반복하는 정신적 행위이다. 이는, 대상의 본래적 의미를 발견하고자 하는 가장 순수한 호기심의 발현인 것이다.


미술은 표현의 주체가 작가 개인임으로 다른 영역의 예술 장르보다 개인적인 경험을 보다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 매체다. 따라서 개인의 경험과 생각들을 정리하고 표현하기 위해 미술은 수 없이 많은 실험을 한다. 그러다 보면 자신이 발견한 매체 즉, 재료가 중심이 되어 자신의 생각들을 정리하게 되는 경우도 생기고, 때론 전혀 다른 전달 시스템을 활용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아니면 타 장르와 융합하는 작업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어찌되었든 미술은 작가 자신의 기획력으로 자기 변화와 표현 방식의 선택과 결정이 언제든지 빨리 진행될 수 있는 매력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보다 친근하게 극단의 대립 속에 놓인 인물들이 추상적으로 해체되는 과정과 그 과정이 왜 필요한지를 보여주기 위한 정재철의 선택은 ‘렌티큘러’다. 렌티큘러는 일종의 프린팅 기법이다. 두 개 이상의 이미지를 시점의 변화에 따라 입체적으로 또는 전혀 다른 이미지를 볼 수 있게 만드는. 사실 정재철의 추상회화에는 이미 사회관계 내에서 이중적 시각으로 대상화 되었던 인물들이 그려져 있었다. 그 인물들이 겪었던 결정된 사실들이 판단유보 되면서 추상화 되었을 뿐. 작가의 추상 속에는 그들이 늘 존재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재철의 렌티큘러는 그 인물로부터 최종적인 추상화 작업까지의 과정을 보여줄 수 있는 가장 명료한 재료이며 그 어떤 매체보다 훨씬 작가의 의도와 사고들을 보여줄 수 있는 뛰어난 장치다. 두 가지 이상의 이미지를 렌티큘러가 가지고 있는 매체적 특성에 접목하여 렌티큘러 프린팅 자체가 작품이 되는 식의 작업도 많은 관심과 감상의 묘미가 될 수 있겠지만, 정재철의 렌티큘러는 보다 다른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즉, 렌티큘러 자체가 아니라 정재철 추상이 시작된 지점에 대한 작가적 의지와 그 의지로부터 발전된 철학적 사고까지를 담을 수 있는 또 다른 물감이고 붓이라는 것이다. 어찌 보면 지극히 단순한 접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단순한 접근은 사회적 관계 내에서 극단의 대립으로 이중적 사고의 대상이 되었던 인물, 그리고 그 인물이 겪었던 이중적 잣대에 대한 판단의 유보를 위해 그 인물을 해체했음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어쩌면 이는, 정재철이 바라보고자 하는 대상과 그 대상의 궁극적인 표현을 위한 단순하면서도 가장 명확한 장치인 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정재철의 렌티큘러가 오래 전부터 고민해 왔던 회화적 성취로서 그의 추상이 끝까지 가지고 가야 할 사회적 메시지를 늘 명료하게 전달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과 함께 응원이 동시에 생기는 것은 사실이다. (글. 임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