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시 명: 이지성 기회초대전 "Melancholy : 알 수 없는 그 무엇"
전시기간: 2015년 11월 25일 ~ 12월 9일
전시 오프닝: 2015년 12월 2일 (수요일) 오후 6시
장소: 쌀롱 아터테인 (서대문구 연희동 708-2)
전시기획: 황희승 큐레이터 02-6160-8445

 

터널같이 아주 긴 어둠속에서

아주 긴 어둠이 터널처럼 내게 있었던 때, 나는 늘 우주의 신비에 매료되어 있었다. 그 우주는 멀리 지구 밖에 그 누구도 모를 상상속의 우주가 아니라 일상속에서 언제나 신비롭게 발견되는 모든 것들이 내겐 우주였다. 눈에 보이는 것 그래서 믿을 수 있는 것들을 난 우주로 여겼고, 그 신비로움은 내게 막연하나마 터널을 지날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이었다. 마침내 그 희망은 실날 같은 빛으로 터널 끝에서 빛났고, 나는 어둠 속에서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나 그 우주는 점점 더 외계의 그 무엇처럼 인지할 수 없는 에너지로 변형되어 수시로 내게서 무언가를 빼앗아 갔다. 그 무언가는 이 삶이 지속되는 동안 늘 그대로 있을 것 같은 주변의 모든 익숙한 것들이었다. 익숙함의 부재. 삶의 모든것들이 낯설어지는 매 순간마다 나는 침체되었다. 우울하고 불안하여 두렵기까지 했다. 멜랑콜리는 정신의 영역이 아니라 육체적 영역이기도 했다. 육체적 영역으로 스며든 멜랑콜리는 삶을 지리하고 멸렬하게 만들었다. 더이상 삶의 그 어떤 자극에도 반응할 수 없었고 그렇게 나는 고립되었다. 희망을 찾기위해 나는 죽음을 택해야했다.

이지성의 그림은 이렇게 읽혀진다.
이지성은 오랜시간 그림을 그리고, 읽고 또한 그림 그리는 사람들에 관한 글을 썼던 기획자이며 작가였다. 해서 다양한 기법과 작품에 대한 접근법을 지속적으로 고민해 왔던 여느 작가들과는 확연히 다른 감성으로 그리고 있다. 솔직히 ‘그리기’보다는 ‘이야기하기’가 더 맞는 표현일 것 같다.
그는 자신의 삶에서 느껴지는 가장 주된 감성을 간단하면서 복잡하게 멜랑콜리로 설명한다. 그리고 그 복잡한 멜랑콜리를 이미 익숙함이 사라져 낯설어진 경험의 공간으로 옮겨 놓는다. 그로 인해 오히려 정신 이상적인 극단적 우울을 견재하며 조금씩 인간적인 관계를 회복하고 있는지도 모를일이다. 조금 더 그의 이야기를 읽어 보자.

처음이다. 누군가에서 죽음을 보았다. 정확하게 반으로 갈라져 달빛아래 널부러져 있는 그의 모습을 보고 나는 가위에서 깨어났고, 그렇게 머리속이 맑았던 적이 없었다. 현실속에서도 계속해서 떠오르는 그 대낮처럼 밝았던 보름달과 두팔을 벌린채 반으로 갈라져 있던 그의 모습이 너무나 선명했다. 만약 신이 저렇게 십자가에 매달려 있었다면 나는 지금보다 더 신에게 집착했을지도 모르겠다. 닫혀지지 않는 문과 닫을 수 없는 문 중 과연 내가 들어갈 수 있는 문은 어느쪽일까.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반대로 내게 남은 희망은 결국 나를 버릴거야 그것만 인정했어도 이렇게 지독한 멜랑콜리는 나를 찾지 않았을까. 작고 납작한 구멍속으로 끝없이 기어들고 싶다. 그럼 이 길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지금보다 일초라도 늦게 시간이 흐르는 다른 차원에서 살 수 있지 않을까. 거긴 아마도 멜랑콜리 따위는 없을거야. 무기력으로 오염된 희망을 되찾고 싶다.

이렇게 작가의 감성 전반에 걸쳐 흐르고 있는 멜랑콜리는 모노톤으로 그려졌다. 사실적인 표현보다는 문득 스쳐 떠오른 듯 그렸다. 작가는 연구하듯 멜랑콜리를 자신의 언어로 만드는 과정을 여과없이 그대로 표현했다. 일반적 조형언어보다 심리적 언어가 먼저였다. 이는 작가의 말처럼 또다른 ‘광기에 대한 방패’로서 자신에게 내면화 되어있는 멜랑콜리를 외면화시키면서 오히려 우울과 무기력을 마비시키고 있는지도 모를일이다. 고독과 우울에의 초대. 인간성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로 부터 시작된 병적인 소외감. 그에 대한 환기로서 예술은 너무나 진부한 이야기겠지만 스스로의 카타르시스를 찾는 과정이며 삶에 대한 존재에 대한 조그마한 안도감일 것이다.
(글. 임대식. 미술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