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 : 전나환 특별 기획전 "Paper and Canvas"
Date : 7th, July ~ 10th, Aug., 2022
Opening : July. 7th, Fri. 6 pm
Place : Artertain (Yeonhi-dong, Seodaemungu)
Curator : Heeseung Hwang (+82 (0)2-6160-8445)

 

동시대적 시대성의 성찰

‘정체성’이라는 개념은, 항상 자기 규정을 전제로 설명된다. 여기서 ‘자기 규정’이라고 하는 말은 스스로 정한 규정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누군가 정해놓은 기준에 의해 스스로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정체성은 세상과 내가 부딪히는 지점, 경계의 범위와 내용을 나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자기 결정에 따른 사회적 관계와 책임에 대해 당당해야 한다는 것. 그래서 정체성은 사회적 관계망에서 나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무기인 동시에 정해진 사회적 규범과 다르다는 이유로 공격의 표적이 될 수도 있다.

아담과 이브 사이
사회가 규정하는 정체성은 대부분 이분법적인 성향이 강하다. 내가 맞으면 너는 틀렸다는 것. 이는 폭력과 권력화의 논리로 굳어져 왔으며, 그 깊은 이면에는 남성중심의 사회구조를 만들어야 했던 정치, 경제적인 목적이 단단하게 깔려 있다. 사랑과 소망과 믿음을 바탕으로 인류 구원을 역설하고 있는 종교 역시, 아담을 대표로 이브를 부속시키는 논리로 전 지구의 생명들을 암컷과 수컷으로 이등분했다. 이로써 인류는 정상의 기준을 획득하게 되고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지켜야 할 지상 명령과도 같은 사회적 정의가 되어버렸다. 모든 인류와 그들이 믿고 있는 종교가 그랬듯이. 나하고 다른 것은 틀린 것이라는 부동의 논리가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폭력과 핍박이 합리화 될 수 있는 무자비한 논리가. 그렇게 종교는 지배를 위한 지배, 정치는 종교의 지배 아래 부를 축척하면서 권력화 되었다. 중심과 주변, 지배와 피지배라는 이분법적 논리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유사 이래, 윤리 강령에 지배적인 영향력을 가져온 대표적인 실천 이념이었던 유교, 기독교는 지배체계를 옹호하는 이념들이었다. 이해와 인정보다는 틀린 것들을 바로 잡아야 하는 계몽과 선도가 더 중심이 될 수밖에 없는 이념들이었다. 이로써 아직 국가적 시스템이 형성되지 않았던 부족국가들은 계몽과 선도의 대상이 되었고, 그 목적을 위해 핍박과 갈취에 대한 합리적 옹호가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담을 먼저 흙으로 빚고 그의 외로움을 위해 이브를 아담의 갈비뼈로 지었다는 누구나 다 아는, 기독교가 이야기하는 인류 탄생의 서막이다. 물론 거기에는 에덴이라고 하는 지상낙원이 미장센으로 있어야 했지만. 그 미장센은 철저하게 기독교가 인류 구원의 중심일 수 밖에 없는 장치를 가지고 있다. 모든 것들이 다 허락된 에덴의 중심에다 먹음직한 열매를 심어 놓고, 절대 먹지 말라는 인간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도 모를 뱀이 이브를 유혹했고, 다시 이브는 아담을 유혹했다. 그리하여 신의 경지를 탐했던 인류 최초의 인간 부부는 낙원에서 쫓겨나 험하디 험한 지구에서 죽음과 삶의 고통을 온전히 느껴야 했던 장치들. 그래서 그 고통을 극복할 수 있도록 신은 자신의 아들을 선뜻 인류에게 보내줬고, 그를 통해 우린 죽음과 고통을 극복하면서 현세를 살아가다가 다시 낙원으로 되돌아 갈 수 있다는 믿음의 근거를 확보했다는 것이다.


위의 이야기가 종교를 비판하고, 그 근원적인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단지, 우리의 사고와 판단의 기준이 선과 악, 빛과 어둠, 너와 나, 남과 여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던 이념과 신념 체계를 이야기 하고 싶었던 것 뿐이다.


나와 너 사이의 간극. 수 없이 많은 경험과 결정의 순간들로 인한 판단에 따른 그 미묘한 차이는 면면히 인류의 도덕적 이념으로 흐르고 있는 단순한 잣대로 무시해도 될까라는 의문으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다. 칼로 베어 두 동강을 내어 버리는 폭력적인 판단 기준보다는 쉼 없이 흐르는 물은 벨 수 없음에 대해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기준이 어쩌면 지금 이 시대에 가장 유연하게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방법이지 않을까. 그렇다면, 아담과 이브 사이에 수없이 다른 아담과 이브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을 것 같다.

다름의 공동체로부터
위에서 말했듯이 너와 나의 사고와 주장이 다를 때, 그 반대의 사고와 주장은 다른 것이 아니라 틀렸다라고 하는 순간 폭력은 시작된다. 그것이 물리적이든 정신적이든 분명히 둘 중 어느 한쪽은 폭력을 당하게 될 수밖에 없는 논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 사회적 규정과 다른 사고와 정체성을 선택한 사람들은 침묵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전나환 작가는 그 다름의 사회적 순기능적인 정의를 자신의 작업으로 선언하고 증명해 왔다. 이분법적 판단으로부터 시작된 폭력에 대한 저항으로, 너와 나 사이의 수없이 많은 다름이 있으며 그 다름으로 인해 오히려 서로를 더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을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작가는 차이가 이해되고 인정되는 연대를 통해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공동체를 시각화하여 다름으로 오히려 타자에 의해 기입된 역사와 사회적 규범을 흔들고자 한다. 그의 화면에서 보여지는 소년들은 개별적인 자기의 영역을 가지고 있으며 서로 겹치면서 분리되지 않을 것 같은 하나의 덩어리처럼 구성된다. 그리고 모두 같은 곳을 바라본다. 작가는 자신의 소년들이 한 방향을 바라보게 함으로써 커뮤니티의 방향성을 부여하고자 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소년들에게는 여전히 갈 길이 있음을 명확하게 선언하고 있다.


보통 다름에 대한 이해는 객관적인 사실에 근거하기보다는 지극히 개인적이면서 주관적인 판단과 정서적 공유가 선행되었을 때 그 이해의 폭이 더 넓고 명확해질 수 있다. 객관적인 사실은 상대에 대한 이해보다는 사실과 다르지 않을까 하는 의심을 해소하는 근거라면 주관적인 정서의 공유는 의심을 해소하고자 하는 사실보다 상대가 말하고 전달하고자 하는 심적 의미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과연 무엇 때문에 왜 지금 자신의 이야기를 저렇게 하고 있는지에 대한 신뢰에서 비롯되는 폭넓은 이해가 가능해 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해는 다시 상대의 결정과 판단에 대한 인정의 감정으로 발전 할 수 있는 바탕을 만든다.


따라서 이해와 인정의 감정은 서로 다르지만 같은 곳을 향해 갈 수 있는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테제를 만들게 된다. 어떠한 사건과 사물들이 발전을 시도하는 최초의 단계로서 테제는 차이가 해소됨으로 인해 이해와 인정된 더 많은 다름들 간의 정서적 소통과 함께 폭력적인 이분법적 정상성의 기준과 맞설 수 있는 에너지가 증가되고, 이는 목적을 공유하는 공동체를 넘어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가 필요 없는 진정한 소통의 플랫폼으로 성장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전나환 작가는 바로 이 플랫폼으로 성장될 수 있는 원동력으로서의 공동체를 그리고자 했다. 차이의 경계가 없는.

이해와 인정의 행진
권력은 늘 상징을 만들고 그 상징의 뒤에서 지속적으로 자신의 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 또 다른 상징들을 재생산한다. 쉽게 말해, 동시대를 살고 있는 모든 이들의 욕망이 향하고 있는 비가시적인 목표를 가시화 시키고, 현실화 될 수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줌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오히려 그 권력을 지켜주고 있다는 것. 그래서 권력은 그 대중의 욕망을 가장 먼저 상징적으로 가시화시킬 수 있는 조직이나 사람이 갖게 된다. 그러나 권력은 대중의 욕망을 우선시 했을 때, 말 그대로 권위를 확보할 수 있는 것이지 권력 자체를 유지하기 위해 지배적인 스스로의 욕망에 집중하는 순간 더 이상 대중들로부터 얻은 권력은 유지될 수 없다는 것. 역시, 권력이 지니는 또 다른 이면이다.


전나환 작가가 가장 지양했던 부분은, 다른 것이 인정되지 않는 자기 집중적 권력이다. 그릴 수 있다는 것. 바라보고 느끼고 표현할 수 있다는 것. 그에게 그것은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일종의 매체이면서 자기 성찰의 그물이었다. 하늘과 땅 위에 드리워진 얽히고설켜 있는 그물들. 이는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그물로 주로, 우리의 양심과 같이 작동된다. 즉, 사회적 질서를 위한 법이 아니라 타인과 살고 있음에 대한 스스로의 도덕률이다. 말하자면, 누군가에 의해 타의적으로 옭아매기 위한 그물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가 바라본 그 자신에 대한 정의 그리고 그 정의를 바탕으로 지켜내고자 하는 자기 결정들이 곧, 그 그물이 되고 그 그물의 얽힘과 설킴으로 나는 그리고 너는 자기결정의 근거를 단단하게 확보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동시대를 바라볼 수 있는 수 없이 많은 그물들. 자기 성찰의 시각들이 존재할 수 있다. 작가는 이들의 존재가 단순히 누군가와 다르다는 것을 인정받기 위해 연대하는 것보다 정해진 규정의 경계에 대해 끊임없는 의심과 질문하는 공동체를 위해 행동했(그렸)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서로의 가치가 있으며 그 가치로 인해 상생할 수 있다. 즉, 아마존 깊은 정글에 아무도 모르게 피고 지는 꽃으로부터 지금, 여기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의미를 찾고자 한다면, 동시대를 이루고 있는 그 어떤 존재도 소홀할 수 없다는 것. 그것이 무엇이든, 그것으로부터 내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 전나환의 동시대적 성찰. 나아가 그리고자 했던, 그의 작업에 가장 근간이 되는 주제였지 않았을까.


옆으로 서서 같은 곳을 향하는 작가의 화면에 등장하는 소년들은, 누가 봐도 걷고 있는 것 같다. 일종의 행진과 같은 운동감, 행동이 느껴진다. 막연하게 하늘을 바라보는 듯한 시선도 시선이지만 여전히 그들의 표정은 이해와 인정의 기다림으로 충만하다. 다름으로 인한 슬픔과 고통보다는 차이의 경계가 지금을 살아가는 데 있어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충분히 깨달았음을. 그리고 그것이 지니는 삶의 또 다른 의미를 다 같이 공유할 수 있음에 동참할 수 있는 행진인 듯하다. 작가의 말처럼, 우리에게는 아직, 여전히 가야 할 길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글. 임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