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 : Hyunsun Jo "Intimate Distance"
Date : Jun. 23th ~ Jul. 11th, 2017
Opening : Jun 28th, 2017, Fri. 6 pm
Place : Salon Artertain (Yeonhi-dong, Seodaemungu)
Curator : Heeseung Hwang (+82 (0)2-6160-8445)

 

추상, 너와 나의 거리

시간은 우리의 현존재를 가늠하고 삶을 인식 가능케하는 개념이다. 끊임없이 현재를 과거로 밀어내고 다시 미래를 현재로 바꾸는 것이 어쩌면 우리가 쉽게 설명할 수 있는 물리적인 시간의 개념일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객관적으로 시간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은 그 끊임없는 현재화 과정에서 무엇인가 축적되어 가는 과정을 목격하는 것이다. 우리가 현재 있는 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것 역시 현재화의 축적이다. 만약 시간이 없다면, 우린 그 어떤 물리적이고 감각 가능한 결과들을 얻을 수 없다. 결국, 현재 우리가 삶을 영위해 나가는 과정은 현재 존재하는 이 공간에서 끊임없이 반복되어 축적되는 현재화의 결과인 것이다. 추상은 이러한 시 공간적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그 무엇에 대한 추적이며 추출적인 인식 행위다. 해서 추상회화는 이러한 추적과 추출적 인식행위를 가시화 하는 과정이라 말해도 과언은 아닐 듯 하다.

우리의 기억들은 대부분 파편화 되어 있으며 그것들이 시간과 같이 반복적으로 축적되기 시작하면서 만들어지는 이미지들, 조현선 작가는 이러한 이미지들을 통해 자신의 인식의 부스러기들을 추상적으로 가시화 시킨다. 작가는 의식적으로 무의식을 추적한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것이다. 그에게 회화는 삶을 살아가는 과정일 뿐이니까. 즉, 생각의 흐름이 그 자체 회화가 될 수 없을까에 대한 고민, 자연스럽게 환경에 적응되거나 영향을 받는 생각과 행동들이 어쩌면 삶의 가장 핵심적인 구성요소인 것은 아닐까.

집에서 나와 작업실로 가는도중 무의식적으로 저장되어 버린 이미지들, 경험들. 다시 떠올려 보면 온전히 기억되지도 않을 만큼 무심하고 덧없는 것들이 작가의 추상적 충동을 자극한다. 그렇게 금방이라고 잊혀질 듯한 사소한 것들이 그의 그리는 행위 속으로 스며들면서 우리에게 볼 수 있는 혹은 읽을 수 있는 이미지로 전환된다. 회화를 이루고 있는 기본적인 요소를 충족시키면서 그리고자 하는 대상을 철저하게 자신의 의식과 내면으로 향하게 만드는 것. 그리하여 보는 이들에게는 극도의 난해함을 선사하는 듯 한 조현선의 추상회화는 시작되고 있다.

무엇을 그렸는지 알 수 없다는 것. 그로인해 추상회화는 난해하다. 그러나 동시대를 같이 살고 있는 어느 한 사람이 오늘 하루 느꼈던 일상의 경험이 색으로 혹은 도상으로 일기 쓰듯이 그려졌다고 생각하면 추상회화만큼 세상 허무할 정도로 쉽게 감상 할 수 있는 그림은 없을 것이다. 내가 오늘 경험했던 일들을 머릿속에 떠올려 보자. 아침부터 지금 현재 조현선 작가의 작품 앞에서 그의 작품을 감상할때까지의 일들을 기억해 보자. 개인차는 있겠지만 그것들은 그렇게 쉽게 떠오르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살면서 늘 겪었던 어느 하루의 아침 중 하나였던 오늘 아침은 아주 특별한 사건이 없었다면 뜨거운 물로 김이 서린 목욕탕처럼 뿌옇게 떠오를 것이다. 차라리 지금 보고 있는 조현선 작가의 작품이 그 뿌연 기억들보다 더 명확한 이미지일 것이다. 즉, 우리의 의식은 물리적인 시간으로부터 언제나 자유롭기를 원하기 때문에 기억을 물리적인 시간적 규칙에 적용시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부분이 바로 우리가 추상회화를 통해 공감하고 때로 편안한 느낌과 내 의식 속 어딘가에 있었을 법한 기억들과 이어지면서 감상이 일어나는 지점이라는 것이다.

시뮬라시옹은 원본이 사라지고 복사물의 끝없는 재생산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이러한 원본없는 복사물들의 재생산은 원본의 의미가 완전히 뒤바뀌거나 전혀 다른 의미로 전환되어진 세계 즉, 시뮬라크르를 탄생시킨다. 일반적으로 원본은 완벽한 무엇이면서 한편으로 권위와 권력의 상징이다. 시뮬라시옹은 이러한 권위를 파괴하여 의미 파악의 세계를 넓히는 과정이기도 하다. 어쩌면 조현선 작가의 추상회화는 무엇보다도 원래의 추상회화의 의미를 파괴하는 시뮬라시옹의 실천인지도 모를일이다. 그는 자신의 회화를 다시 복제하고 재생산하는 과정을 반복적으로 진행함으로써 무엇을 그려야겠다는 자신의 의지를 표현하기 보다는 내면의 의식들이 자신의 화면위에서 무엇이 되어 가느냐 하는것에 더 관심을 가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그리는 행위는 의식적인 무의식적 행위의 반복이다.

이러한 작가의 무작위적인 반복은 작가와 그의 작업간의 간극을 수 없이 채워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계속해서 채워가면 갈 수록 오히려 그 간극이 너무나 명확하게 느껴진다는 것. 작가는 어쩌면 그의 작업을 통해 그 틈을 메우기 보다는 그 자체를 인정하고 익숙해지고 싶어 했는지도 모르겠다. 완벽하게 밀착되어 하나가 되지 못한다면 그 거리를 이해하고 즐기는 것. 작가가 말하는 ‘친밀한 거리’는 서로가 서로의 영역을 인정하고 그 거리만큼만 밀착되고 그 거리만큼만 객관적이라는 말인 듯 하다. 그렇다면 감상하는 사람들 역시 충분히 그 간극을 통해 작가의 기억이 아닌 작품 그 자체가 되어버린 자신의 이야기들을 떠올릴 수 있지 않을까. (글. 임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