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시 명: 최은숙 기획초대전 "for the Better"
전시기간: 2016년 6월24일 ~ 7월 12일
전시 오프닝: 2016년 6월 24일 (금요일) 오후 6시
장소: 쌀롱 아터테인 (서대문구 연희동 708-2)
전시기획: 황희승 큐레이터 02-6160-8445

 

상처받은 ‘나’를 위한 추상


권력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 형성된 일종의 지배수단이다. 가정과 같은 지극히 친밀한 관계에서 뿐 아니라 민족, 국가와 같은 거대 집단에서조차 권력은 지배적이다. 개인이나 집단의 의사를 결정하는데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 권력이다. 권력은 타인의 의견이나 생각들을 강제적으로 굴복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권력은 누구나 가지고 싶어하는 욕망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권력은 권위와 같이 개인의 능력이나 타인의 옹호에 의해 자연스럽게 생겨나기 보다는 상호 호혜적, 다시말해 서로의 이익이 보장되는 범위 내에서의 상관관계에서 발생한다. 그러므로 권력은 다양한 형태로 우리의 삶 곳곳에서 불쑥 튀어나와 나와 너 또는 나와 전체의 계급적 경계를 그어버린다.

최은숙 작가는 이러한 권력에 상처받은 개인의 삶을 그린다. 그의 유년기의 경험은 이미 전체의이익을 지키기 위한 졸렬하고 구차한 권력의 이면을 그에게 보여주었다. 그러면서도 자신 역시 그 권력을 쫓고 있다는 것을 늘 환기한다. 인간의 어쩔 수 없는 본능이기도 하지만 그 환기야 말로 작가의 작품이 시작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전체의 이익을 위해 끊임없이 강요되는 개인의 희생은 가장 밀접하고 친밀한 가족 관계에서도 드러난다. 가족이라고 하는 틀을 지키기 위해 강요되는 개인의 역할. 어쩌면 권력에 길들여질 수 밖에 없는 개인의 희생은 여기서부터 시작되는지도 모르겠다. 이 부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은 최은숙 작가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이러한 유년의 경험은 자연스럽게 권력지향적이며 권력의존적인 성향을 만든다. 작가가 그리고 있는 공간 역시 이 부분에서 시작되고 있기 때문에 그의 환기가 곧 그의 작품이 시작되는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그의 작품은 둘 이상의 집단 활동이 가능한 공간, 권력 지향적인 욕구가 작동하고 나름의 성취가 발생하는 장소를 다루고 있다. 일상적인 실내 공간에서의 계급적 관계 혹은 권력지향성이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에 대해 연구하고 있는 작가의 작품은 상당히 건조하다. 작가의 말처럼 권력이 작동하는 사회 구조내에서 억제되고 조율된 감성의 표현이다. 모노톤이나 푸른빛이 감도는 회색톤의 작품에 때로 유치한 색상으로 추상적인 패턴이 병치되는데 이는 상처받은 개인을 위한 추상성이면서 동시에 권력의 졸렬함을 비꼬기 위한 작가 특유의 장치다. 이 추상성이야말로 작가 스스로도 위로 받는 감성의 포인트이면서 권력지향적인 거대한 사회 구조에 저항하는 작가의 의지이기도 하다.

최은숙은 우리의 삶에 밀접한 공간, 즉 실내 공간에서 보여지는 권력지향성, 다시말해 사회적 관계성을 찾는다. 자신의 부를 과시하기 위해 생뚱맞은 디자인의 탄생. 예를들어 자신의 부와 고상한 취미를 남에게 과시하기 위해, 공간에 비해 너무나 과하게 고급스러운 실내 장식이 주는 이상한 조화. 이 역시 사회적 관계성에서 우위를 차지하고자 하는 권력지향적 성향의 상징이다. 예식과 회의가 진행되는 라운드 테이블. 너무나 고급스러운 세팅이 되어 있는 이 테이블 역시 엄청난 권력의 재편성이 일어나는 치열한 공간이다. 테이블의 주인이 되고 싶은 사람들의 다양한 욕망이 넘실거리는 곳. 그리고 그 위에 이를 조롱하는 유치한 추상적 패턴이 흐르고 있다.


작가의 이 유치한 추상적 패턴은 사회적 관계망에서 형성되는 권력에 대한 단단한 내러티브를 깨는 장치다. 모든 권력을 가지고 있는 것들은 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시스템을 구축한다. 이른바 사회적 관계망을 통한 통제 구조다. 이 구조는 또 다른 세력이 권력을 갖더라도 이용해야할 구조인 관계로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세력이나 그 기득권을 빼앗으려하는 세력이나 항상 유지하고 단단히 하고자 한다. 따라서 항상 거기엔 수없이 많은 개인의 희생과 상처가 공존한다. 단한번도 깨지지 않을 것 같은 그들의 권력 수호 내러티브는 어쩌면 우리가 알고 있는 개인의 희생과 상처를 드러내는 행위 즉, 유치한 추상적 패턴으로 드러내는 개인의 감정으로 깨질 수도 있지 않을까. 감정의 표출이야말로 바위보다 더 단단한 계란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작가는 ‘좌향좌’ 라는 작품을 통해 너무나 일반화 되어버린 우리의 시각에 대해 이야기 하고, 말그대로 너무나 건조하고 평면화된 놀이터를 그림으로써 이미 아이들의 놀이에 조차 스며든 권력과 지배적 구조에 대해 이야기한다. 유치원 아이들의 생일 파티에 쓰이는 꼬깔모자나 사탕 목걸이와 같은 보상심리를 통해 하고 싶지 않지만 해야되는 체제 순응적 세뇌작용을 꼬집고 이로인해 전체에 의해 희생된 개인의 심리를 그린다. 강요된 희생. 그것으로 포장된 보다 나은 삶, ‘Better Life’는 어쩌면 개인의 희생을 통한 전체와 나의 잠재된 화해가 아닌가 싶다. 삶의 지속성을 위한 화해라고 위로하며 받아들이기에 우리의 삶은 너무 허무하다. 이 허무와 무능이야말로 우리가 알게 모르게 갖게된 패배의식의 숙주다. 작가가 잠깐 머물렀던 런던의 부촌의 창문들로 부터 받았던 빈부의 격차는 계급적인 차이를 느끼게 할 만큼 상당히 권력적이었다. 이유도 없이 패배했다는 생각으로 한없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 한 기분. 무엇을 위해 더 좋은 삶을 꿈꿔야 하는가. 작가는 이야기 한다. 제3의 시선으로 바라보기. 유치한 추상적 패턴으로 생각하기. 그들의 내러티브가 아니라 나만의 충만한 감정으로 비틀어 보기. (글. 임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