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 : Byungkwan Kim / Heajoon Cho show "Counter Work _ Artist Kim vs Artist Cho"
Date : Aug. 5th ~ 23rd, 2016
Opening : Aug. 5th, 2016, Fri. 6 pm
Place : Salon Artertain (Yeonhi-dong, Seodaemungu)
Curator : Heeseung Hwang (+82 (0)2-6160-8445)

 

카운터 워크: 김작가 대 조작가 - 기획 : 이은정

▣ 기획자의 辯
잡문들만 이곳 저곳 흘리고 다니던 작자가 어느 날 전시를 기획하겠다고 나섰을 때에는 그럴 만한 사정이 있는 바, 여기서 짧게나마 그 연유를 밝히고자 한다. 오랜만에 상봉한 지인 작가들과 향연을 벌이는 가운데 젊은 예술가들의 곤궁한 생활과 최근 이들의 다양한 판로개척 행사들이 안주로 올라오게 되었다. 무릇 향연이란 술 취해 골아 떨어진 자들이 속출하는 가운데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파네스처럼 두 명의 논객이 한치의 양보도 없이 날카로운 말의 칼날을 주고받는 것이 제 맛이다. 그 날의 향연 역시 난장으로 펼쳐지다 결국은 두 명의 작가가 첨예한 대립각을 세웠는데, 이들이 바로 김병관 작가와 조해준 작가이다. 논쟁에 지쳐가던 본자는 밤이슬이 내려도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유사流砂 구덩이를 벗어나고자 꾀를 내었으니, 싸움은 붙여야 맛이라는 시장의 지론을 들먹이며 공평한 심판관도 세워놓고 제대로 무대 위에서 붙어보자고 설득했던 것이다.

아터테인에서 자리를 마련해 준 <카운터 워크: 김작가 대 조작가> 전시는 나의 혀가 발설한 그날의 신의를 지키기 위한 것으로, 미완성 향연을 다시 시작하는 향연-이후, 혹은 포스트-향연이다. 20세기의 저명한 미학자 아서 단토 선사先師께서는 예술이 사회적인 맥락 안에 존재한다고 선언하였으나, 우리가 정작 고민하는 문제는 그 사회라는 것이 너무나 다층적이고 추상적이라는 점이다. 김작가의 예술이 다루는 사회는 시물라크르를 팔아먹는 소비자본주의로서, 그는 시대적인 아이콘들과 미디어의 소비재들을 가지고 변주하는 작업을 한다. 반면 조작가의 예술이 겨냥하는 사회는 역사의 비주류에 속하는 평범한 개인들의 일상사와 주류/비주류를 분할하는 미술담론으로서, 그는 변방의 예술가들에게 목소리와 이야기를 부여해 견고한 고급예술의 카르텔을 와해시키는 작업을 한다. 이들의 대립은 미술이 대상으로 삼는 사회적인 것에 대한 차이와 이해방식뿐만 아니라 미술계에서 생존하는 방식에서도 나타난다. 김작가는 미술시장에서 많은 러브 콜을 받고 있지만 미술담론에서는 주목을 받아본 적이 거의 없다. 반면 조작가는 화려한 수상경력들이 보증하듯이 미술담론이 사랑하는 작가이지만 미술시장에서는 존재감이 초라한 형편이다. 김작가가 표면들과 이미지들과 가시적인 것들을 가지고 유희하면서 “그 너머는 없다”고 말한다면, 조작가는 노출되지 않는 것들, 이미지화되지 못한 것들을 집요하게 수집하고 다니면서 “여기에 우리가 주목해야 할 소중한 무엇인가가 존재한다”고 응수한다.

작품들의 면면을 본다면 서로에 대해 한 치도 양보하지 않고 대립하기에 이들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한 쌍이다. 그러나 대화dialogue가 시작되기 위해서는 둘/dia-이 필요하고, 대결은 동류同類가 아닌 것들 사이에서 벌어질 때 흥미롭고 짜릿한 것이 아니던가. 이들은 미술이라는 사회적 장의 한쪽 끝과 다른 쪽 끝을 보여주지만 결국 모두 무대 위의 투사들이다. 그리고 우리의 무대는 미술이라는 영토가 자신의 경계선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포괄하는 하나의 공간이라고 자처할 작정이다. 관객들께서는 부디 우리가 마련한 이 향연에서 오늘날 대한민국 미술계가 앓고 있는 시름병의 양상을 진지하게 진단해 보시고, 말씀 한 마디 베풀어 주시기를 …

디오니소스에게 영광을 바치며!

순수미술의 두 변방: 김작가와 조작가의 뜻밖의 마주침
(문혜진 : 미술이론)


여기 공통점이라고는 찾기 힘든 두 작가가 있다. 한 사람은 소위 순수미술계의 적자로 국립예술대학을 나와 당시 부상하던 주요 대안공간을 거쳐 비교적 어린 나이에 담론계에 무난히 안착한 작가요, 다른 한 사람은 1990년대에 미대를 졸업하고 생계를 위해 컴퓨터 그래픽 업계에 취직해 한참을 지내다 뒤늦게 붓을 잡아 2011년에 첫 개인전을 한 늦깎이 작가다. 한 사람의 작업은 한국근현대사라는 과거의 기억을 소재로 따뜻하고 소박한 아날로그 정서에 맞닿아 있고, 다른 사람의 작업은 매스미디어나 인터넷에서 소비되는 대중적 아이콘들을 빠른 붓질로 담아내 동시대 디지털 문화의 표피성을 그대로 반영한다. 한 작가는 광주비엔날레, 삼성미술관 리움,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등 주요 미술관 및 전시들을 섭렵했으나 비평계의 인정과 달리 상업시장과는 인연이 없었고, 다른 작가는 뒤늦게 복귀한 탓에 홀로 고군분투하다 사치(saatchi) 갤러리를 비롯한 해외 상업미술계에서 먼저 인정을 받았으나 상대적으로 비평적 자리매김이 부족하다. 그밖에도 차이점은 많다. 글과 그림이 혼합된 흑백 드로잉 대 표현주의적 붓질이 두드러지는 정통 회화, 대리 제작 대 직접 제작, 남성 피사체 대 여성 피사체 등.


이처럼 결이 다른 두 작가의 2인전을 접할 때, 가장 먼저 드는 의문은 어떤 근거로 상반된 두 작가를 엮게 된 지일 테다. 선택의 이유를 묻는 나의 질문에 기획자는 인물 초상이라는 장르적 공통점 외에 의외의 이야기를 했다. 두 작가가 미술계라는 모호한 영토에서 각기 다른 끝에 속해있어 서로 만날 일이 없는 이질적인 존재들이고, 이런 두 작가를 한 무대에 올리면 미술이라는 영토가 스스로의 경계선을 드러내는 계기가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녀의 말처럼 미술계라는 방대한 영역 안에는 수많은 지류들이 존재하고 각 분파는 실상 각자의 생리대로 돌아가는 별개의 장이다. 한편에는 미술전문지, 비평가, 주요 미술관과 비엔날레로 상징되는 비평계(담론계)가 존재하고, 다른 한편에는 갤러리, 옥션으로 대변되는 상업시장이 자리한다. 상업미술계 역시 단일하지 않아서 비평계와 공유하는 고급미술 작가들이 있는 반면, 미술잡지에는 소개되지 못하나 소형갤러리 등에서 판매되는 세컨드 마켓이나 야외 조형물 시장이 별도로 존재한다. 한편 ‘작가’로 상징되는 순수미술계 밖에는 ‘업자’로 대변할 수 있는 생계형 미술인들도 있다. 조해준 아버지의 직업이었던 미술교사나 거리의 초상화가들, 영화 간판 제작자들, 동화책 삽화가 등이 일례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김병관과 조해준의 작업은 여러 층위에서 미술제도와 교차된다. 우선 두 작가는 각기 상업미술계와 비평계에 속해있으나 교집합이 아닌 여집합에 속한다. 다시 말해, 김병관은 상업적으로는 인정받는 작가지만 비평계와는 아직 거리가 멀고, 조해준은 그 반대다. 다른 한편 이 두 작가는 순수미술계에 속해 있으나 다루는 대상이나 배경, 접근 방법론 면에서 비제도권 미술계와 맞닿아 있다. 김병관은 미술계로 들어오기 전 컴퓨터 그래픽 업계에서 일했고 여기서 배운 기술로 디지털 드로잉 작업도 병행한다. 조해준의 경우 아버지라는 아마추어 미술인의 화풍과 양식에 기대고 있고 다루는 소재 역시 미술 밖의 소시민의 개인사다. 그런 점에서 이 글은 두 작가의 작업이 미술 제도를 메타적으로 건드리는 지점들에 주목하고자 한다.


이번 전시에 출품한 조해준의 <미군과 아버지-초상>(2013-2016)은 그간의 이력과는 살짝 궤를 달리하는 변곡점이 될 수 있는 작업이다. 우선 가장 먼저 눈에 띄는 형식적 차이는 흑백 드로잉이 아닌 채색 유화라는 점이다. 실제로 이 연작은 그의 작업 중 유화로 제작한 첫 작품이자 최초의 채색화이기도 하다. 또한 글과 그림이 병치된 이야기 그림에서 탈피해 이미지만으로 승부하는 첫 작업이기도 하다. 장면을 묘사하던 것에서 탈피해 미군들의 두상만 그린 인물초상이라는 점도 새롭다. 하지만 가장 크고 중요한 변화는 그간 유일한 제작자로 군림하던 아버지의 자리에 제3의 인물이 개입했다는 점일 것이다. 기존의 조해준 작업의 제작 패턴은 기획자이자 프로듀서, 감독인 작가가 작업의 방향을 설정하고 소재를 전달하면 실행자이자 제작자인 작가의 아버지(조동환)가 그림을 그려 작품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소재가 아버지의 개인사, 당숙의 일대기, 민중미술 작가 8인의 민주화 투쟁사, 동독인의 눈으로 본 북조선 이야기로 달라졌을지언정, 이야기가 최종 통과해 이미지로 변하는 필터가 작가의 아버지라는 점은 동일했다. 그런 점에서 소박하고 구수한 아마추어 화풍의 텍스트·이미지 병치 구술 드로잉이라는 형식은 내용과 별개로 변화 없이 유지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일관성은 한편으로 조해준 작업의 트레이드마크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반복으로 인해 진부해지는 문제도 일으켰다. 새로운 대리인(agency)의 등장은 이러한 딜레마에 대한 돌파구로 보인다. 하지만 여기서 새로운 실행자인 평택의 초상화가는 단순히 과거의 아버지 자리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작가의 사이에 끼어들어 전달-변형의 과정을 한층 복잡하게 만드는 매개 장치로 작동한다. 실로 이 작업에서 아버지의 자리는 여전히 건재한데 그런 점에서 <미군과 아버지-초상>은 구작인 <미군과 아버지>(2002-2009)를 새로운 방식으로 재매개한다고도 볼 수 있다. 아버지가 카투사 시절의 기억을 더듬어 미군들의 초상을 흑백 드로잉으로 그리면, 평택 미군부대의 상업 화가가 이를 모본으로 색채를 가미해 초상화를 완성시킨다. 결과적으로 완성작은 같은 세대라 할 수 있는 두 아마추어 작가의 합작품이 되는데, 이 과정에서 두 제작자가 무의식중에 지니고 있는 양식적 관념과 경험이 결과물에 배어나오게 된다.


전달 과정의 이중적 변형과 양식적 공통 감각은 이미지의 재구성이라는 측면에서 흥미로운 지점이다. 작가의 아버지가 그린 투박하고 어눌한 형태에 미군부대의 초상화가가 입힌 색은 한 사람이 그린 듯 잘 어울린다. 재미난 점은 이런 식의 패턴화된 캐리커처 초상이 초상화가의 본래 화풍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진과 최대한 똑같이 묘사하는 포토리얼리즘의 작풍을 주로 그리는 상업화가에게 사진 없이 자유롭게 색을 입히는 경험은 낯선 것이었다. 이 이례적인 요구 앞에 화가는 몇십 년 동안 축적된 경험치를 적용했다. 수십 년 미군들을 그려낸 경험에 따라 인종별로 특유의 머리색과 눈 색, 피부색을 적용한 것이다. 아버지의 기억과 상업화가의 기억이 겹쳐지며 특정인의 초상이 아닌 미군 일반의 보편적 초상화가 탄생한다. 이 과정에서 두 사람의 양식 또한 절충되는데, 아버지가 그린 모본 드로잉의 양식화된 윤곽은 초상화가의 사실주의 작풍과 조우한다. 화가가 형태에 어울리게 색을 입히긴 했지만, 기존의 사진사실주의 작풍은 부분적으로 남아 정형화된 형태와 절충된다. 일례로 얼굴에 적용된 입체적 음영과 인물 주위에 부드럽게 드리운 후광은 조명을 준 사진관 사진의 특징이 반영된 것이다. 화풍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한 몸인 양 어우러지는 색감과 형태감은 일종의 세대적 공통 감각으로, 작가 아버지와 상업화가 모두 생활 미술인이었다는 데에 기인한다. 고급미술 밖에 존재하던 비제도권 이미지 생산자들의 보편적 양식, 이것이 이번 전시에서 조해준이 길어 올린 순수미술의 바깥이다.


한편, 김병관이 그리는 작업 소재는 고급미술과 대척점에 있는 대중문화다. 상업적으로 가장 큰 반응을 얻었던 미키마우스나 마를린 먼로를 해체한 그림 외에도 그가 선택한 소재는 모두 대중문화의 아이콘이다. DC 코믹스의 인기 캐릭터인 할리퀸 코스프레를 소재로 한 최근작이 그 예다. 이번 전시에서 그가 택한 소재는 미군이라는 점에서 조해준과 외견상 일치하지만, 택한 방향이나 질감은 상반된다. 그는 밀리터리 문화가 패션으로 소비되는 측면에 초점을 맞춰 미국 여성 군복을 입은 젊은 여성들의 초상을 그렸다. 인물을 소재로 그렸으나 김병관의 그림은 초상의 본질과 거리가 멀다. 그는 그려진 대상이 누구냐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조해준의 <미군과 아버지-초상>이 불특정 다수의 초상인 것과 다른 방식으로 김병관의 <military show>(2016) 또한 익명의 비/초상이다. 상품문화의 표피적 현상을 다루지만 실상 의도하는 바는 진지한 회화적 실험이라는 것이 제도적 측면에서 김병관의 특이점이다. 그의 작업은 대중문화를 소재로 시장에 어필하기에 상업적이지만, 소재나 재료, 표현기법의 모든 측면에서 회화를 대상으로 한 꽤 치열한 게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김병관이 아이콘적인 이미지를 즐겨 사용하는 것은 그것들이 ‘단단한 이미지’(작가)기 때문이다. 단단하다는 것은 그만큼 익숙해서 전형화되었다는 뜻으로, 회화적으로 공격할 경우 변주 가능성이 많다는 의미기도 하다. 친숙한 이미지를 회화적으로 해체해서 아는 이미지가 생경하게 다가올 때 낯설음은 극대화된다. 이러한 충격 효과는 해체적 붓질로 얻어지는데, “이미지를 풀어주고 부여잡고 또다시 풀어주는” 방법은 의도적 헛스윙을 꾀하는 것이다. “형상을 갖추려는 의지는 있으나 계속 와해되는” 이미지는 재현의 책무에 종사하면서도 비껴나는 회화적 유희다. 원본 사진이 지니는 실제의 기록이 회화적 필터를 거치며 허물어지고난 자리, 그 자리는 본래 참조했던 이미지의 목적성이 사라지고 아직 다른 목적이 주어지지 않은 열린 가능성의 자리가 된다. 이런 부유하는 중간의 지점을 만들어내는 데는 아크릴이라는 재료와 빠르고 얇게 스치고 지나가는 붓질이 필요하다. 빠르게 마르는 아크릴은 짧은 작업 시간과 잽싼 붓질을 요한다. 이에 따라 물리적으로나 의미론적으로나 얇은 그림이 산출되는데, 인스턴트한 아크릴의 속성은 피상적인 대중문화의 속성과 일치한다. 또한 유화의 대체재 역할을 하는 아크릴은 진짜를 흉내내는 가짜라는 측면에서도 표면과 시뮬라크르를 다루는 김병관의 주제에 부합한다. 미군을 흉내내는 천편일률적인 미녀들은 초점을 설정했다 놓는 그리기 게임을 통해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유령 같은 존재가 된다. 여기서 본래도 가짜였던 표피적 대상은 붓질을 통해 지워져 떠돈다.



상업시장에 속하나 한국의 순수미술계에서는 배제되어 온 김병관과 담론계에서는 알려졌지만 일반 대중에게 작업을 팔아본 적이 없는 조해준이 대중적인 상업 화랑에서 판매를 전제한 전시를 한다는 것은 메타적 관점에서 흥미롭다. 각기 다른 방식으로 순수미술계의 양쪽 끝에 있는 두 작가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제도의 다른 면을 두드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외국 시장에서만 호평을 받은 김병관에게도, 상업 미술과 거리가 멀었던 조해준에게도 중산층 컬렉터를 상대하는 국내 상업 갤러리는 낯선 장소다. 대중문화를 소재로 하는 김병관의 작업이 취향 차이를 극복하고 국내 시장에도 어필할 수 있을 것인가? 하위문화에 기반한 상업화가의 소박한 초상화가 비제도권의 미적 정서를 공유한 일반 대중에게 어떻게 보일까? 친숙함에 호감을 보일까 아니면 고급 미술의 선입견에 어긋나 꺼릴 것인가? 이들의 작업을 제도권의 문턱 높은 일급 갤러리에 가져다 놓으면 맥락은 또 어떻게 바뀔까? 해당 장소의 권위가 두 작업에 적절한 상업적 가치를 부여할까? 한번 상업적으로 방향을 틀고 난 후 과거의 비평적 지위가 유지될까? 이미 상업적 의미가 부여된 작업이 비평적으로 재의미화되는 데는 무엇이 필요한가? 이 모든 질문들은 미술계 내부의 배타성과 경계를 넘는 어려움을 상기시킨다. 판매용 전시일 수 있는 이번 전시가 제도비판적이고 메타적인 성격을 띠게 되는 것은 이런 질문들에 대해 생각해 볼 때다. 그때서야 김작가와 조작가라는 두 이질적인 조합은 의외성이 아니라 뜻밖의 깨달음 혹은 경계의 확장으로 다가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