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 아터태인 브랜드 기획전 "회화의 시대"
Date : May. 15th ~ May. 31st., 2026
Opening : May. 15th, Fri. 6 pm
Place : Artertain (Yeonhi-dong, Seodaemungu)
Curator : Heeseung Hwang (+82 (0)2-6160-8445)

 

회화의 시대에 산다는 것

사유한다는 것은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수많은 이미지들을 재조합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사유는 기억이 담고 있는 서사들을 이미지로 치환하고, 그 이미지들을 다시 매 순간 부딪히는 상황에 맞게 퍼즐을 맞추듯 움직이며 필요한 순간에 가져와 사용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따라서 사유는 직접적으로 대상을 판단하려는 것보다, 대상이 자극하여 떠오르는 이미지화된 기억들의 새로운 조합인 셈이다. 결국 사유한다는 것은 나의 의지라기보다는 수없이 외부로부터 자극을 받으며 생겨난 이미지들, 즉 기억들을 어떻게 혹은 얼마나 절묘하게 끄집어낼 수 있느냐에 따라 그 방향이 전혀 다른 결말을 맺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회화는 이러한 사유 방식 그대로 우리의 의식 활동에 개입한다. 회화는 사유의 시각적 방법론으로서 기억 속 이미지들을 실제로 조합하는 과정을 시각적 결과물로 만드는 행위인 반면, 철학적 사유의 방식은 우리의 의식 활동을 인식론적인 방법론을 통해 정리해낸 결과물인 것이다. 여기서 기억의 이미지를 실제적으로 재조합하는 과정으로서의 회화는 기억이 저장되는 특징을 본질적으로 활용하는 반면, 기억을 인식론적인 방법론으로 재정의하고자 하는 철학의 사유 방식은 기억을 형성했던 상황들을 서사적으로 객관화함으로써 사유의 공식을 만들고자 노력한다.

두 방식 모두 사유하고자 하는 우리의 의식 활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방법론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기억으로부터 시작되는 사유를 객관화시켜 또 다른 사유의 근거를 만드는 의식 활동으로서의 철학은 사유를 객관화시키는 정신 활동을 전제하기 때문에, 사실 그를 통한 사유의 범위가 매우 한정적일 수 있다. 그에 비해 회화는 사유의 과정을 직접적이고 직관적으로 표현하기 때문에 생산자가 사유하고자 하는 방향을 쫓는 데 있어 매우 유리하다. 즉, 생산자의 사유의 결과물, 다시 말해 작가의 상상력을 통해 수용자들은 사전의 객관화된 사유의 정의가 없어도 충분히 생산자의 사유 영역에 침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시각적 소비물들이 넘쳐나는 시대에 우리는 과연 사유의 영역을 어떻게 확보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으로 확장될 수 있는 지점이면서, 동시에 회화는 지금을 어떤 시대로 다시 규정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이 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라킷키 작가의 회화는 정동의 시대를 말한다. 작가는 우리가 생각하기 이전에 어떠한 사건을 맞닥뜨렸을 때, 사고 이전의 순간 느껴지는 감정과 기억들이 생겨나는 순간을 그린다. 소양강의 잔잔한 물결 위를 타고 들어오는 햇볕은 그 상상만으로도 눈이 감기고 온몸으로 따뜻한 기운이 감돈다. 라킷키 작가의 시선은 그곳에 머문다. 햇살이라고 부를 만큼 잔잔한 물결 위에 빛나는 햇빛.

작가는 그 물결을 가장 정적인 점으로 그린다. 잔잔하게 흔들리는 물결을 가장 최소한의 공간을 점유하는 점으로 표현했다는 것 자체가 정동의 시작이다. 움직임과 멈춤이 동시에 확보되는 순간 우리는 사유 이전의 사유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지극히 다른 두 개의 경험이 부딪히는 지점. 거기에는 단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새로운 경험들이 존재하게 된다. 이미 있었던 존재라기보다는 순간적 사고의 발견이라고 하는 것이 더 맞는 말일 것 같다. 바로 그 순간을 만들고 있는 것이 라킷키 작가가 살고 있는 회화의 시대다.

오다솔 작가의 회화는 끝없이 정의되지 않는 시대를 말한다. 모든 사물은 그 사물의 의미를 정의하지 않음으로써 해체된다. 기억은 이미지로 파편화되고, 그 파편화된 이미지들은 새로운 사물로 재정의됨으로써 우리가 바라보는 대상은 여전히 정의되지 않는다. 시간은 물리적으로 나뉘어지지 않는다는 것, 즉 지속된다. 지속은 시간의 처음과 끝을 정하거나 물리적으로 쪼개어 사고할 수 없음을 이야기한다. 작가는 이러한 시간의 지속성을 바탕으로 원본이 보존되지 않는 기억의 파편들을 수렴하고 재구성하는 작업을 한다.

여전히 정의되지 않는 대상과 흐릿해질 수밖에 없는 기억들의 조합은 작가의 화면 위에 구축되는 추상적 구조로 발현된다. 기억은 결국 명백한 사실과 사건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한마디로 정의되지 않는 대상은 마찬가지로 우리가 사유하고자 하는 방향들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틀어버린다. 이는 회화가 가지고 있는 사유의 방법론으로서 대상에 대한 끊임없는 의심과 절대 그 대상을 정의하지 않음으로써 그 자체를 해체하는 사유의 영역을 공고히 하고 확장하고자 하는 오다솔 작가가 살고 싶은 회화의 시대다.

이유민 작가의 회화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정의하는 시대를 말한다. 자연은 인간에게 가장 완벽한 삶의 근간을 만들어주는 반면, 한편으로는 인간에게 가장 무서운 환경을 만들어 공포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물론 그 자연재해의 원인이 인간이었을 가능성을 배제하기도 힘들긴 하다. 지구가 그 주인으로 인간을 택하게 된 그 오래된 시점으로부터 인간은 자연을 벗 삼기보다는 지배하고자 했고, 그 결과 자연은 그에 대한 답을 주는 방식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자연과 인간의 경계, 그 사이에서 작가는 안식처 또는 은신처 하나쯤은 있어야 되지 않을까 고민했다. 과연 우리가 자연의 분노로부터 피할 수 있는 곳. 어쩌면 그곳은 자연에 대한 깊은 이해와 인간의 욕심이 조금은 잦아드는 곳으로, 결국 인간과 자연의 경계는 그 둘을 이곳과 저곳으로 나누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이해하고 인정하는 곳, 그 사이를 말하는 것 같다. 이는 인간 역시 자연의 한 부분에 속해 있고 자연은 말 그대로 자연으로 있어야 한다는 간단한 이치에 대한 깨달음이 공존하는 이유민 작가가 이야기하는 회화의 시대다.

장영은 작가의 회화는 의도와 무위의 관계를 관찰하는 시대를 말한다. 대상을 관찰하는 데 있어 어느 정도의 객관성을 가져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대상을 관찰함에 있어 최대한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배제하는 것. 이는 대상을 철저하게 대상 그 자체로 남겨둠으로써 그리는 행위가 그리고자 하는 의지와 행위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작가는 그림은 어떻게 그려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림은 어떻게 그려지는가를 묻는 것이다.
화면을 구성하는 장치는 정확한 의도에 의해 구성되기보다는 작가의 처음 행위로부터 자체적인 규칙이 형성되면서 만들어지는 일종의 회화적 사건일지와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작가는 얼마나 그리는 것으로부터 멀어져야 그림 자체가 스스로의 모습으로 완성될 수 있을지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결론적으로 회화는 스스로의 자율성을 획득할 수 있을 때 가장 회화적인 사건들을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음에 대해 끊임없이 연구해야 하는 시간들. 장영은의 회화의 시대다.

정승원 작가의 회화는 사람과의 관계에 대해 끊임없이 떠올려야 하는, 그럼으로써 그들을 기억하는 시대를 말한다. 어떤 장면들은 그 장면을 만들었던 순간들을 떠오르게 하는 단서를 만든다. 흐릿했던 그 혹은 그녀의 기억이 순식간에 명확해지는 것 역시 그 장면과 겹쳐지면서 형성된다. 아무리 떠올리려고 해도 떠오르지 않던 그때 그 기억들이 스쳐 지나가는 어느 한 장면으로부터 명확하게 떠오를 수 있다면, 그 장면은 우리를 그때 그곳으로, 그 시간으로 보내줄 수 있는 티켓이나 타임머신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작가가 집중하게 되는 장면은 결국 누군가에 대한 기억과 그 누군가와의 관계였다. 당시에는 전혀 느껴보지 못했던 그 사람과의 관계가 어떤 것이었구나를 새삼 느끼게 한 장면을 마주하게 되는 순간, 작가는 막연하지만 그들과 더 깊은 관계에 대해 다시 한번 추억하게 된다. 이 추억은 다시 현재로 돌아와 서로의 사정으로 직접 만나지는 못하지만 언제나 보고 싶고 언제나 만나고 싶은 뿌듯한 감정으로 진화되는 일련의 사건들로 확장된다. 말하자면 서로의 감정들이 공유될 수 있었던 장면을 통하면 가장 깊고 깊은 사람들의 관계가 만들어질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 정승원의 회화의 시대다.
(글. 임대식)